해외 노동복지 기행, 쿠바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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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노동복지 기행, 쿠바를 가다.
         - 2017년 9월 20일(수)~ 9월 29일(금) 9박 1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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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무상의료 현장탐방, 갈릭스토 가르시아 병원에서 방문단 (17.9.22)

 

한국노동복지센터 해외 노동복지 기행단이 2017년 9월 20일(수)부터 9월 29일(금)까지 9박 10일간 쿠바 노동복지 현장을 탐방하고 돌아왔다.
글로벌 시대에 센터 후원회원들의 정책안목을 넓히기 위해 마련된 이번 행사에는 총 12명이 참가하여 쿠바 노동복지 현장 체험을 하였다. 
쿠바 방문단은 공무원 노조 관악구청지부 8명, 금융노조 1명, 사회적 기업 1명, 센터 2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번 <쿠바 노동복지 기행 프로그램>은 무상교육, 무상의료 노동복지 현장탐방, 현지 세미나, 혁명유적지 방문, 쿠바 문화체험, 나이아가라 폭포 관광으로 진행되었다.
쿠바 노동복지 탐방은 센터의 해외기행 첫 사업으로서 사전 많은 준비가 필요하였다.
한국에서 쿠바 탐방을 위한 정보와 자료를 참가자가 각자 역할 분담하여 사전 준비하고 현지에서 공동 학습하는 세미나도 가질 수 있었다.

 

일정별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 시

시 간

내 용

비 고

9/20()

18:30

여행 출발

 

9/21()

10:00~12:30

ENA (예술 중,고등학교)

무상교육 탐방, 노트북기증

 

15:00~16:00

쿠바 노동복지 세미나 (코파카바나 호텔)

현지 세미나

9/22()

08:30~10:30

HOSPITAL (갈릭스토 가르시아 병원)

무상의료 탐방, 노트북 기증

9/23()~27()

전일

시엔푸에고스-트리디나드-산타클라라 답사

체게바라 혁명 기념관

9/28()~29()

전일

캐나다 토론토 / 나이아가라폭포 관광

 

 

현지 방문 프로그램의 자세한 일정별 진행 내용을 소개한다.

 

            

                     < 현지 방문 일정별 프로그램 진행 내용 >

 

제1일차 : 쿠바 도착 / 호텔 투숙 ( 9/20(수))


9월 20일(수) 18:30분 인천공항을 출발한 우리 방문단은 TORONTO를 경유하여 HAVANA 호세 마르티 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비행시간이 토론토까지 13시간, 또 아바나까지 3시간 반이다. 경유 체류시간을 포함하면 장장 19시간이다. 거의 하루나 걸렸지만 13시간 늦은 시차로 인해 아직도 오늘 당일이다.
우리를 맞이한 이는 흑인 가이드 알도. 도리우찌 모자에 노란 티셔츠를 입고 공항입구에서 KLWC라 종이에 쓴 손팻말을 들고 있었다. 알도는 쿠바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체코로 유학을 갔다가 다시 평양으로 가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2년간 ‘조선말’을 배웠다고 했다. 50대 중년의 그는 북한에서 단고기 먹은 경험담 얘기도 하며 친근함을 표시했다. 북조선 유학 경험으로 의사소통이 무리 없이 능숙한 편이었다. 우리는 쿠바노 알도 가이드의 안내로 쿠바에서의 전 일정은 무리 없이 소화할 수 있었다.  
열흘 전 허리케인 어마의 후유증이 우리의 일정에 지장이 없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알도 가이드는 대충 복구되어 걱정 말라는 말을 남기고 호텔을 떠났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자다 깨다 19시간이나 밤을 새우고 왔는데 첫날 또다시 밤을 맞이했다.
            
제2일차 : 무상교육 현장 탐방, 혁명광장 방문, 현지 세미나 (9/21(목))  

    
- ENA(예술학교) 방문 ( 10:00~ 11: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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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방문단을 안내한 교감선생님(사진 가운데 회색원피스)은 노트북 5대를 기증받고 함박웃음을 지으며 “태풍으로 정상 수업 진행이 되지 않아 음악 공연을 준비 못했다. 재방문을 요청한다”고 하였다.

   
시차로 인해 새벽잠을 일찍 깬 우리는 쾌청한 하루를 맞았다. 태풍은 온데 간 데 없었다.

가이드 알도가 안내한 무상교육현장을 탐방하였다. 학교는 예나 예술 고등학교다.

학교 입구에서 우리를 맞이한 이는 활달 상냥한 중년의 여자 교감 선생님이었다. 글래머러스한 각선미를 뽐내기라도 하고 싶은 듯 회색 스키니 원피스를 짝 달라붙게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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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감 선생님은 예나학교 구석구석을 설명해 주며 우리 방문단을 친절하게 안내하였다.
예나학교는 원래 골프장이었는데 혁명이후 카스트로가 예술학교 부지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쿠바는 초등학교에서 예술적 재능과 소질이 있는 학생들은 중학교부터 본격적 예술 수업을 하는데, 이 학교 학생들은 11개 지역 주립 학교에서 선발한다고 한다.
1인 1교사 예술특기생 교육이 인상적이었다. 470여 학생을 교사 370명이 가르치고 있었다. 음악의 경우 기타, 피아노 등 20여 가지 악기 수업의 고등학교 과정을 1대1로 무상 교육받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 정도 개인 음악교습을 사교육으로 받으려면 돈이 얼마나 들까? 방문단 일행 중 놀란 누군가의 감탄사가 입에서 자연스레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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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학생들은 짧은 치마의 흰색 교복을 입고 환한 얼굴에 밝고 자유로웠다. 모두들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선택해서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는 느낌이다. 교사들 끼리, 교사와 학생끼리, 학생끼리 서로 포옹하며 뺨을 부비기도 하며 자연스러운 스킨십으로 인사를 하였다. 매일 보는 사람일 텐데도 반갑다고 서로의 얼굴을 비비며 볼 키스 하는 것이 처음에는 생소하기도 하였지만 자유로운 사람들의 본능적 행동이라 생각되니 점차 익숙해 졌다. 그들에게 학교는 즐거운 곳인 듯 참으로 행복해 보인다. 입시 지옥 속에서 사교육에 멍들어 있는 우리 한국사회 학교와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외국인 유학생도 대부분 기숙사 생활을 하는데, 10년 전에 북한 유학생도 1명이 있었다 한다. 우리가 한국인으로는 첫 번째 방문단이라 하며 예나학교 교감선생님은 기증한 노트북을 받고 고마움을 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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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기업 ㈜리맨 구자덕 대표를 컴퓨터 재생회사사장이라고 소개받자 구 대표를 얼싸안고 포옹부터하였다. 구 대표는 교감선생님의 갑작스런 스킨쉽에 적잖이 당황스러운 기색이었으나 이내 현지식 인사에 호응하며 함께 웃었다.
이게 해외 기행 나눔의 보람인가 보다.
열악한 학교 시설에 노트북이 학습 도구가 되어 다소라도 도움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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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학생들이 그려 놓은 멋진 미술 벽화 앞에서 기념으로 사진을 찍었다.

 

- 혁명 광장 방문 ( 13:00~ 14: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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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는 혁명 광장을 둘러보았다. 광장 어디에서든 쿠바 혁명의 주역 체 게바라와 시엔푸에고스의 아이콘이 보인다. 쿠바인들이 그들 혁명 지도자를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 하는지는 거리 곳곳에 체게바라 사진이며 벽화로 알 수 있었다. 쿠바인들의 전설적 혁명 영웅 체게바라는 쿠바 여기 저기 건물 벽이건 어디건 이제 관광 상품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캐나다나 유럽에서 온 관광객들처럼 광장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쿠바 독립의 아버지 호세마르티 기념관도 방문하였다.
허리케인 피해 복구가 안 된 말레꼰 산책로는 안전상 출입이 통제되어 생략되었다.


- 쿠바노동복지 세미나 (15:00~16:00) : (별첨 세미나 자료 참조)

 

쿠바 둘째 날 공식일정을 마친 방문단은 오후에 쿠바 노동복지 현지 세미나를 가졌다. 한국에서 각자 역할 분담하여 준비해 온 자료를 발표하고 토론하며 공동 학습하였다. 발제자들의 열띤 발표에 모두들 즐겁게 호응하였다. 그러나 쿠바에서 모처럼의 자유를 만끽하고 싶은 이들 모두 코파카바나 호텔 해변의 물놀이를 즐기고 싶은 표정이다. 해외에 나와서 까지 학습 시간을 오래가지자고 하면 누구나 피곤해 한다. 해외에 나와서는 여기 저기 둘러보며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쳐 체험하는 것이 진정한 학습임을 우리는 안다. 더운 날 에어컨도 없는 세미나를 서둘러 종료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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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 현지 세미나 (9/23)                   <회의실 에어컨 미 작동으로 야외 세미나 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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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카리브 해 바다로 뛰어들었다. 생각보다 바닷물은 따뜻하였다. 투명하여 맑은 바닷물 속에는 작은 물고기들이 놀고 있었다. 수영하기 좋았다.
센터에서 준비해 간 세미나 책자는 쿠바일정 내내 가이드 역할로 요긴하게 쓰였다.

 

제3일차: 무상의료 현장 탐방 ( 9/22(금))


        - Calixto Garcia 병원 방문 (09:00~ 10:30)

 

쿠바에 온 3일차 일정은 무상의료 현장을 탐방하는 것이다.
우리가 방문한 곳은 갈릭스토 가르시아 종합병원이다. 쿠바 독립전쟁의 영웅을 기려 1896년 설립된 역사가 오래된 병원이다. 면적이 13 헥터, 37개 전문 분야 병원별로 별도 건물을 갖고 있었으며, 어린이, 여성, 외과, 신경, 심장 등 22개 분야 치료와 교육 기능도 갖춘 매우 큰 병원이었다. 로비에 박물관을 만들어 기념물을 전시해 놓고 있었다.
병원장 밑에 4개 부문의 부원장이 있어 그 중 한 명인 골잘레스 박사(Dr. Tania Valdes Gonzalez)가 현관에서 우리를 맞아주었다. 세미나실에서는 쿠바 의료체제에 대하여 자세히 설명해 주고 병원 시설을 탐방하도록 안내해 주었다.
골잘레스 박사는 의료 시스템을 설명하는 내내 병원 의료진들의 열의와 진지함을 느낄 수 있었다. 의술이 ‘돈벌이’ 수단이 아니라, ‘환자 치료’에 있다는 걸 새삼 일깨워 주었다. 의료장비와 시설의 열악함에도 관할 지역 환자 외에 타 지역 환자까지 받아 50만 명을 치료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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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의료 체계는 3단계로 되어 있다. 1차 지역 가정의(Family Doctor) 치료, 2차 일반 병원 치료. 3차 대학종합병원 치료를 한다. 쿠바 혁명이후 가르시아 병원은 종합병원이 되었다. 유학 온 의과대 학생 교육과 전문의 훈련도 한다. 예를 들어, 타 국가 의사 에볼라 치료 파견 전 에 훈련 병원 역할을 한다. 특히, 아프리카에서 유학 온 학생이 많다고 하였다.
매년 의료 전문가 방문 국제회의를 개최하며, 국제 교류도 활발하게 하고 있었다.
한국의 가천대학 길병원과 연 2차례 연구방문 교류를 한다는 사실도 들을 수 있었다.
쿠바에서는 모든 질병 치료가 무료다. 무늬만 무료인 나라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평균수명은 76세, 1,000명당 유아 사망률은 6.4명으로 미국보다 낮다. 인구 1,000만이 조금 넘는 나라에서 종합병원이 280개가 넘고 종합 진료소가 440개가 넘는다. 28개에 달하는 쿠바 의과대학에서는 해마다 4,000 명의 의사가 배출된다. 한국의 의사 숫자가 주민 약 630명당 1명인데 반해 쿠바는 168명당 1명으로 우리 한국의 4배다.
쿠바 정부의 강한 의지와 함께 무상 교육을 통한 의료 인력양성에 힘을 쏟았기에 가능 하지 않았나 싶다. 복지는 돈이 있어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경제 수준이 낮다고 못하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국민의 선택일 뿐이다.
미국의 오랜 봉쇄 속에서 의료 설비 도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한다.
의료장비를 제조업체로 부터 직접 구매하지 못하고 다른 나라를 통해 수입하느라 비싸게 구매해야 한다며, 오래된 장비를 자체 기술 개발로 수리해서 재사용하고 있었다.
최첨단 장비가 없어도 의사가 환자의 고통을 자세히 듣고 진단하여 치료를 한다고 한다. 
쿠바는 미국의 쿠바민주화법, 쿠바자유민주연대법 등 봉쇄 정책으로 모든 미국계 기업의 쿠바와의 교역이 금지되고, 식료품, 의약품 80%가 감소하면서 많은 고통을 겪었다.
미숙아 출산이 증가했고 우유 공급도 중단되었다. 생존의 위기에서 쿠바 정부는 국방 예산을 절반으로 삭감하고 의료비를 증액시켰다. 그리고 대체 의학을 개발하였다.


폴리코사놀은 한국에서도 유명한 혈관 청소제다.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약성분은 한 달 먹으면 콜레스트롤 30%를 낮춘다고 한다. 쿠바에서는 50세 이상 전 국민에게 무상 배급 한다. 외국인도 1달치를 3만원에 구매 가능하다. 우리들은 쿠바 폴리코사놀을 한 웅큼씩 샀다. 폴리코사놀은 한국에서도 해외직구가 구매가능하다. 하지만, 여기는 쿠바. 호주산이 아닌  원산지 진짜(?) 이므로 모두들 현지에 온 김에 카드를 긁었다.
마이클 무어 감독의 영화 ‘식코’는 쿠바의 무상의료 이야기를 유투브로 전 세계에 퍼뜨린 바 있다. 미국 911 테러 시 다친 소방수가 고가의 약값에 치료의 어려움을 겪다가 쿠바에서 몇 센트 밖에 안 되는 약값에 놀란다는... 그 이야기를 우리는 실감하였다.

 

제4일차 : 쿠바 노총 방문 무산, 쿠바의 밤 문화를 경험 9/23(토)

 

쿠바 노총 방문은 성사되지 않았다. 허리케인 ‘어마’ 피해복구 작업에 노총 전 직원이 지방으로 파견 나가 쿠바 노총 본부는 텅 비어 있었다. 미팅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우리는 대신 옆에 있는 시가 공장을 둘러보며 다음에 다시 올 기약을 하며 쿠바 노총 빌딩앞에서 사진만을 찍었다. 그리고 다음 일정인 럼 박물관 방문을 위해 이동하였다.
쿠바는 19세기 중반 전 세계 럼주 제조업을 선도했다. 사탕수수 원액으로 만든 럼주에는 200년 동안의 노예제도를 통해 흑인과 라틴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노동착취의 애환이 서려있다. 우리는 점심이나 저녁 식사 때 마다 럼주에 콜라와 허브를 타서 만든 칵테일 ‘쿠바 리브레’를 마셔보거나 헤밍웨이가 즐겨 마셨다는 '다이끼리' 칵테일도 심심치 않게 경험하였다.
쿠바 음식점은 대부분 국영이고, 종업원 모두 공무원이다. 한국에서 일자리 창출을 위해 소방관, 우체국 집배원 등 공무원을 증원하자고 하니 야당에서 쌍수를 들고 반대하는 게 떠올랐다. 국가가 세금받아 국민들이 먹고 살 일자리를 만들어 주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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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점심이나 저녁식사 때 기타 선율에 맞춰 부르는 수준급 가수들의 라틴 생음악을 라이브로 듣거나 룸바와 살사 댄스를 즉석에서 구경할 수 있었다. 아바나에서든 지방에서든 어디서나 프로와 같은 수준급의 라틴음악과 춤을 매일 볼 수 있었다. 거리 음악은 수준이 아주 높고 쿠바의 춤인 룸바, 차차차, 살사 가 일상화되어 있었다. 쿠바인들은 돈 없이 어렵게 살아도 자존심 넘치고 행복해 보였다. 거리의 음악과 춤 그리고 열정적 쿠바문화를 만드는 이들 모두가 우리가 탐방한 예술학교를 나왔을 것이리라.
아바나 구도시 중심가에는 곳곳이 올드카 전시장이었다. 시내를 한 바퀴씩 도는 관광용 택시로 쓰고 있었다. 겉은 1950년대 과거 그대로 올드 카인데 차 속 부품은 뉴 엔진으로 개조하여 운행에는 문제가 없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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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녁에는 자유 시간을 가졌다. 쿠바의 밤 문화를 경험하기로 하였다. 소모임 별로 나눠 호텔을 나와 택시를 타고 공연장과 나이트클럽을 찾아갔다. 우리 팀은 쿠바의 음악과 춤을 보러 나이트클럽을 갔다. 토요일 밤이라 쿠바 나이트클럽은 남녀노소 불문하고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발 디딜 틈도 없이 사람들이 빽빽이 찬 클럽에는 흥겨운 라틴 음악과 춤과 노래가 있었다. 음악에 몸을 맡긴 쿠바노들은 살사 댄스를 몇 시간이고 추었다. 열정과 에너지가 넘쳐났다. 쿠바에서는 아침이 올 때까지 그렇게 춤을 춘다고 한다. 쿠바 음악을 듣고 있으면 저절로 몸이 들썩 거리고 춤을 추게 되었다. 우리도 댄스 교습을 자청한 쿠바나에게 간단한 스텝을 배웠다. 흉내 내서 따라해 보기는 하였지만 그들처럼 그렇게 허리와 히프가 썩 잘 돌아가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배워야 유연성이 생기나 보다. 그래도, 우리는 색다른 세계에 빠져 땀에 젖어 흥건한 채 쿠바인들과 시간모르게 한 통속이 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시엔푸에고스에 가는 것도 잊은 채 새벽까지 신나게 즐기고 놀았다.

 

제 5일차 : 9/24(일) 시엔푸에고스 문화 탐방 / 호세마르티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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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식민지 개척자와 아프리카 문화가 섞여있는 도시>


쿠바 여행 5일차는 공식 일정은 모두 끝나고 문화탐방이다. 말하자면 관광이다.
아바나에서 300km 떨어진 '쿠바 남부의 진주' 시엔푸에고스를 갔다. 아바나에서 버스로 세 시간 반을 달려 온 우리를 시엔푸에고스에는 하얀 뭉게구름과 아름다운 푸른 해변으로 맞아 주었다. 아바나가 스페인 풍이라면 시엔푸에고스는 프랑스풍의 도시이다.


호세마르티 공원에 갔다. 호세마르티는 누구인가? 19세기 말 쿠바 제2차 독립전쟁 당시 시인이자 언론인, 철학자, 다재다능한 쿠바인들의 정신적 지도자이다. 쿠바인들을 전 세계적으로 결속시켜주는 강력한 구심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시몬 볼리바르의 이념적 계승자이다. 피델 카스트로가 롤 모델로 삼았을 만큼 쿠바에서 그의 영향력은 대단한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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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이름이 붙어 있는 공원에는 인터넷 연결에 목마른 자들이 와이파이존 나무 그늘 아래 스마트폰에 혼을 뺏긴 채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공원을 중심으로 호화로운 19세기 건축물이 즐비하다.
토마스 테리극장 내부는 말굽형으로 콜로세움을 본 땄다고 하며,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었다. 사진촬영을 못하게 하여 아쉬웠다.
아스클레시오 델 바제 궁전은 사탕수수 제분소로 돈을 크게 번 대농장주가 1913년부터 4년에 걸쳐 지은 건물이라고 한다. '아라비안나이트'에나 나올 법 호화롭기 그지없었다.
귀족의 저택은 쿠바혁명 이후 국가소유로 바뀌어 국제 관광객을 위한 레스토랑이 되었다.
우리는 카리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저택 옥상에서 뜨거운 태양과 시원한 바람을 즐기며 품격있는 귀족의 포즈로 잠시 앉아 보기도 하였다. 바다 배경이 좋은 곳이었다.


숙소는 시엔푸에고스 외곽 바닷가에 있는 리조트였다. 쿠바인들의 국민 휴양지 란초루나에는 온 가족이 휴가차 놀러 와 아이들과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뜨거운 태양아래  풀장에서 우리도 함께수영을 즐겼다.

저녁에는 쿠바 어디서나 그러하 듯 음악공연이 펼쳐졌다. 아이들과 함께 휴양온 쿠바 가족들이 공연을 보며 흥겨운 음악에 몸을 맡기고 흥겨운 기차춤 놀이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쿠바 아름다운 휴양지에서 아직도 시차 적응이 안 된 채 한밤중에 일어났다.
아무 할 일 없이 밤바다로 나가 하늘에 떠 있는 별을 쳐다보았다. 콘도 근처 풀숲에는 뭍으로 나온 주먹만한 게들이 여기 저기 기어다니고 있었다.
란초르나 풀장은 한국에서도 보았던 오리온 별자리의 삼태성을 배영으로 누워서 날이 밝아 올 때까지  쳐다보기 좋았다. '쿠바의 파리' 시엔푸에고스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 6일차 : 9/25(월) 트리디나드 문화 탐방 / 이즈나가 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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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나가 타워(사진1번째)는 사탕수수 농장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과거 노예 감시탑,

19세기의 시계가 멈춰진 트리디나드 중앙광장(사진 5번째),198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

 

우리가 쿠바여행 6일차에 방문한 트리니다드는 중부 남서쪽에 있는 도시다.

1514년 스페인이 쿠바를 정복하고 초대 총독 디에고 벨라스케스가 세웠다 한다.

 한동안 쿠바에서 가장 부유한 도시였다는데, 시계가 그때 그 시간에 멈추어 있는 듯 매력적인 도시였다. 공원, 성당, 건축물 등 스페인의 식민 정착지 당시 살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미국의 경제 봉쇄는 역설적이게도 쿠바의 관광자원이 되어 있었다. 돈이 없어 개발할 수 없는 상황이 그 시대 당시의 건축물들을 온전히 엔티크한 모습 그대로 빛나게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하였다.

 

우리는 마을 생활하수 처리를 위해 자갈을 깔아 만든 당시의 배수로 위를 걸어서 마을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한참의 세월을 건너 온 이색적인 도시의 모습에서 친근감과 정겨움을 느꼈다. 거리에서는 스페인 시대 당시 사람과 같은 모습의 차림을 한 노란티를 입은 사내가 시가를 손에 들고 구걸 하듯 1페소를 외치는 소리를 들으며, 어쩌면 16세기 과거의 인물이 지금 말을 걸어오는 듯 착각을 느끼곤 하였다.  

 

우리가 오전 관광을 마치고 묵은 곳은 바닷가 휴양지 리조트 호텔이었다.
우리는 태양이 뜨거운 아름다운 카리브 해 비치에서 오후 내내 수영을 즐겼다. 모든 음료가 리조트 숙박비에 포함되어 있어서 무료였다. 우리는 야자나무 그늘 아래서 바다를 바라보며 다이끼리와 쿠바 리브레, 그리고 모히토를 번갈아 시켜가며 마음껏 마셨다. 경치 좋은 이국적인 비치에서 망중한을 즐겼다.

 

제 7일차 : 9/26(화) 혁명 유적지 방문 및 현지 문화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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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게바라 동상, 산타클라라 >


아바나로 돌아오는 길.

버스에서 본 쿠바의  산천은 청정지대 그대로였다.

미국의 오랜 경제 봉세 속에서 화학비료, 제초제 등 농약 수입이 제한되어 자연 퇴비로 농사짓는 유기농이 발전하였다. 그리고, 야채와 채소 등을 스스로 자가 조달해야 하는 상황은 도시농업을 발달시켰다.

점심에 들렀던 식당 2층에서는 식재료로 쓸 채소를 유기농으로 기르고 있었다. 도시농업이란 말은 쿠바에서 처음 생겼다고 한다.
쿠바의 모든 소와 말은 국가재산이다. 농사를 짓고 우유를 생산해야 하므로 함부로 잡아 먹으면 법적 처벌을 받는다. 그외의 가축인 돼지나 닭은 도살할 수 있다고 한다. 어쩌다가 소고기가 많이 먹고 싶은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는 우리의 말에  알도 가이드는 우스개 소리를 하였다. 그런 경우 쿠바 마을 사람들은 아주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러 기찻길 옆으로 소를 내몬다고 하였다. 우리는 크게 웃었다. 자본 주의든 사회주의든 국가가 법으로 모든 걸 통제하기는 어려운가 보다. 오늘날 오염과 유해 물질을 생산해 내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사람 사는 환경을 생각하였다.


산타클라라에서는 체게바라 혁명 유적지 탐방하였다.

마침, 체게바라 서거 50주년 기념 행사를 준비 중이었다. 우리는 운 좋게도 기념행사 예행연습을 하고 있는 군인학교 병사 들의 구 소련식 제식 훈련을 볼 수가 있었다.
산타클라라는 체 게바라가 이끄는 24명의 혁명군이 300명이 넘는 정부군 무장 열차를 탈취해 쿠바 혁명 성공의 분기점을 만든 곳이다. 그래서 이곳에 혁명 기념관을 세우고 체 게바라의 시신을 안치해 놓았다. 체게바라는 1967년 볼리비아 게릴라 투쟁 중 서른아홉 나이에 총살당해 죽었다. 10년 뒤 1967년 볼리비아 정글에서 유해를 찾아와 이곳 산타클라라라에 무덤을 만들었다고 한다. 아직 못찾은 1명의 유해 찾기는 3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고 한다. 볼리비아로 함께 떠났던 동지들의 시신도 그와 함께 묻혀 있었다. 그리고 체게바라가 불태웠다는 무장열차도 봤다.

 
체게바라는 마에스트라 산맥의 혁명 캠프에서 글을 모르는 혁명군의 선생님이기도 했고, 부상병을 치료하는 의사이기도 했다. 쿠바혁명 이후 지금의 무상 의료와 무상 교육의 시스템을 만든 설계자였고, 또 불가능에 도전한 이상주의자였고 인간 승리자였다.
소외된 이웃에 대한 무한 애정으로 쿠바 혁명에 혁혁한 공을 세우고 또 다른 혁명의 길을 떠나는 치열하고 불꽃같은 삶을 산 체게바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그의 열정과 의지는 지금까지도 쿠바 민중의 가슴속 깊이 새겨져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었다.
우리는 제3세계의 자유를 상징하는 인물, 세계인들의 가슴에 우상으로 남은 체 게바라 동상을 배경으로 모두가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산타클라라 비달공원에는 광장 주변을 빙 둘러 식민지 시절의 관공서와 문화 시설이 늘어져 서 있었고, 골목마다 관광객을 위한 기념품을 판매하는 거리 상점이 즐비하였다. 녹색의 건물 리브레 호텔의 벽에는 산타클라라 전투 당시의 총탄 자국이 상흔처럼 군데군데 남아 있었다.

인근 학교 점심시간인지 중고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삼삼오오 나와 공원 벤치에 앉아 있었다. 호기심어린 눈으로 우리 이국인을 쳐다보는 쿠바나 여학생들과 우리는 기념사진을 찍었다. 밝고 순수하고 건강했다. 쿠바의 미래가 될 눈웃음이 예쁜 아이들이었다.


아바나에 돌아온 우리는 다음날 떠날 쿠바와 마지막 인사를 하였다.  
가이드 알도에게 그 동안의 쿠바탐방 일정을 별 탈 없이 안내해 준데 감사하며 노트북 1대를 기증하였다. 그리고 우리 센터와 쿠바 노총과의 원활한 네트워킹을 부탁하며  앞으로 쿠바 연락사무소장 역할을 맡아 달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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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8일차 : 9/27(수) 아바나에서 캐나다 토론토로

 

쿠바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 우리는 비행기 시간이 촉박하여 새벽같이 일어났다.
오전 11시에 캐나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였다. 한국인 여행 가이드가 나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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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는 나이아가라 폭포를 관광하는 일정이다.

점심 먹고 오후 반나절 만에 2시간 거리 나이아가라로 가서 폭포를 관광하는 것이다. 빡빡한 일정에도 여행 가이드는 옵션 관광 영업을 하였다. 버스 속에서 캐나다 달라 130불짜리 제트 보트 옵션이 나이아가라 폭포를 보는데 빼놓아서는 안 되는 중요한 일로 주지하였다. 우리는 이미 익숙한 자본주의 체제에 무장해제 된 채 모두가 제트 보트 타는 옵션관광에 동의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러나,속으로는 눈 뜨고도 코 베어가는 돈놀이 게임에 끌려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장모상을 당해 하루 일찍 귀국한 실무 책임자가 없어 여행 일정이 통제되지 않았음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여행가이드가 이끈 옵션 관광부터 숨 가쁘게 먼저 하고 난 후  폭포 주변을 조망하며 둘러보는 기본 일정을 마쳤다. 밤이 늦어서야 토론토로 돌아와 호텔에 체크인 하였다. 자본주의 체제는 돈 있는 여행객을 상대로 성과를 챙겨야 먹고사는 여행 가이드를 탓할 수는 없었다. 우리도 대부분 그렇게 살고 있으니까. 하청, 재하청 도급으로 착취구조가 일상화되고 자본주의 모순이 극대화된 여행업계에서 고가의 옵션 상품을 강매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가이드를 보면서,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으로 또 다시 돌아왔음을 실감하였다.

평등의 가치를 중시하여 더불어 고르게 사는 그런 세상을 아련히 건너와서, 자유의 가치를 중시하면서도 끊임없이 개인 욕망을 부추기는 그런 자본주의 세상으로 이제 회귀한 것이다.


쫑파티는 호텔 로비에 있는 바에서 맥주 한잔씩을 놓고 약식으로 치렀다.
모두들 피곤에 절어 축 늘어져서 있는데 평가회는 밤늦게 무슨  얼어 죽을 일인가. 


어설픈 마무리에도 쿠바 노동복지기행은 참으로 유익하였다. 쿠바 현지에서 ‘또 다른 세상’을 매일 보고 느끼면서 우리 사회 공동체가 어떻게 가야할지 생각하고 배웠다.

 

제 9일차 : 9/28(목) 귀국

 

우리 방문단은 TORONTO 현지시간 9월28일(목) 13:45분 비행기로 귀국하였다.
하루가 지난 9월29일(금) 16:30에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였다.
참으로 멀고도 긴 쿠바 여행에서 돌아왔다.

 


 
                         < 쿠바 노동복지기행의 성과와 한계 >

 

그동안 ‘아시아연대프로그램’은 지역적으로 가까운 중앙아시아, 동남아를 택한 반면에 쿠바는 거리와 비용 면에서 부담이 많이 가질 수밖에 없었다. 쿠바 노동복지현장을 직접 보는 것은 비용 대비 효과 면에서 대부분 만족하였지만 참가자 숫자가 적어 더 저렴한 비용의 여행을 만들 수는 없었다. 앞으로, 규모의 경제를 만들려면 참가 동인을 이끌 수 있는 홍보 전략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였다.
또한, 쿠바가 사회주의 국가이므로 여행지 현지 상황 상 여행사 용역서비스에 의존할 수  밖에 없었다. 여행 일정의 자율성과 신축성 등 운영에 있어 센터의 주도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한계도 노정되었다. 
그러나, 여행을 떠나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학습자료를 잘 준비하여 현지 세미나를 원만히 가질 수 있었고,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노동복지 현장 체험에 있어서도 ‘아는 만큼 보는’ 성과가 있었다.
아쉬운 점은 여행 전 발생한 현지 태풍 피해로 쿠바 노총 간부들이 수해복구 활동으로 부재중임에 따라 노총 방문이 이루어지지 못하였고, 현지에서의 네트워킹 노력도 좌절 되고 무산되었다.
참가자가 12명에 그쳐 소수 인원으로 센터 재정 상황에서 비용대비 효과에 미흡한 점이 있으나, 센터 해외기행 첫 사업으로서는 전반적으로 좋은 시도였고 괜찮은 성과를 만들었다고 자평할 수 있겠다.


별첨) 현지 세미나 자료집 / 첨부 파일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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